News Release:
2014 12. 31.
박충구 교수 칼럼 - 예수와 회칠한 무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다양한 욕구, 이해관계들이 부딪히며 무수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현장이다.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위험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국내 사건만이 아니라 국외의 사건들이 우리 내부를 위협하기도 한다. 남북의 군사·정치적 긴장과 대립관계가 있고,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있는가 하면, 계절풍을 타고 날아드는 황사도 있고, 지정학적 세계화의 논리도 있고, 악성 에볼라 바이러스의 위협도 있다. 그리고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갈등과 문제들은 얼마나 많은가?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생명의 공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긴장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하여 자칫 잘못하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위기도 있다. 그리고 끝없는 경쟁구조 속에 처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느끼는 것이 있다: 위험에 대한 인식능력과 과도한 욕망의 유혹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살고 있다. 예기할 수 없는 없는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긴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 가다가 죽임을 당하고, 공연을 보다가 땅이 꺼져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길을 가다가 죽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니 서로를 향해 안녕을 비는 마음이 더 짙어진다. 욕망의 크고 적음이 있겠으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위험을 피하고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기회를 경쟁적으로 찾는 셈이다. 이렇듯 한 편으로 위험을 인지하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더 좋은 기회를 포착하여 다른 이보다 더 낳은 삶을 살아가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들인 셈이다. 신앙의 길을 간다 하여도 기본 공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사회나 위험과 탐욕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지만 이런 법칙이 보다 순화된 사회가 있고, 보다 악화된 사회가 있다. 예컨대 사회적 안전망을 잘 확충해 사회 구성원 개인의 안전을 잘 보장해 주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사회적 안전망이 허술해 사회 구성원 개인이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사회도 있다. 제아무리 불리한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는 선진 사회가 있는가 하면 어느 사회에서는 동일한 조건의 사람이 비인간적으로 버려지기도 하는 후진 사회도 있다. 좋은 사회와 나쁜 사회의 조건은 인간의 존엄한 권리에 대하여 사회가 존중하고 지켜나가려는 공공의 가치들이 얼마나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종교는 당연히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할 당위를 가진다.
동구권의 몰락 이후 신자본주의의 이념적 승리가 확보된 세계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추구는 “규제 없는 세계”를 향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보다 많은 이익을 얻어가는 집단이나 개인은 상대적으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은 항구적인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위험과 탐욕의 보편적 성격이 세계화 속에서 더 증폭되어 한편에서는 더욱 위험한 사회가, 다른 편에서는 더 큰 탐욕이 보장되는 사회로 양분되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되는 세계에서 종교의 역할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이런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의 탐욕이 극대화되면 다른 편의 사람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종교는 끝없는 성장과 확대를 하나님의 일인 양 선전하면서 탐욕을 극대화하며 이 길이 축복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경향이 크다.
과도한 탐욕에 대한 종교의 승인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일 이러한 메시지가 계속된다면 기독교는 탐욕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상향 지향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는 셈이다. 언젠가 나는 어느 목사의 설교제목을 보고 아쉬운 느낌을 버릴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 분의 주일 설교 제목은 “윗자리는 비어있다!”였다. 과연 우리는 신자들에게 높은 욕망을 가지고 경쟁적 관계 속에서 최고의 윗자리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신앙의 이름으로 교사해야 하는 것인가? 과연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높은 윗자리에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실까? 그 길을 연장해 보면 군사주의적인 긴장과 다툼의 길이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길이며, 정치적으로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자리가 아닐까? 과연 이 길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일까?
종교가 신자들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자극하는 수단은 간단하다. 낙관주의적인 긍정적 사고와 유물론적인 성공 신화를 끝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동료인간들과 삶의 공동성을 나누는 길이 아니라 경쟁과 착취와 억압의 길 위에서 포장된 긍정의 길과 성공의 길을 자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성공의 길을 가는 이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푯대로 바라 볼 수 있을는지 나는 해명하기 어렵다. 타인의 삶을 식민지화하는 욕망으로 교묘히 포장된 신앙인의 삶에 과연 ‘이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 길을 미화하려고 사람들은 ‘선한 경쟁’이라는 온화한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사실 삶의 전선에서 선한 경쟁은 없다. 어느 사회에서나 억압과 착취와 폭력 등 비인간적인 행위들의 근원은 과도한 탐욕을 가진 이의 욕망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종교의 외면을 자랑한다면, 그리하여 내면의 통찰과 영성조차,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친절조차 상품화하기 시작하면 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집단이 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의 선교, 봉사, 전도가 일종의 상업화된 전략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친절조차도 전도와 선교의 수단으로 전락하곤 하는 것은 현대 교회의 자기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의미한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교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종교의 상업적 프로젝트는 일면 참된 종교의 본질에서 먼 것이다. 참된 종교의 본질이 사라진 교회에서는 사랑도, 친절도, 봉사도, 헌신도 모두 종교 집단의 자기 성장과 확대를 위한 상업화 전략의 소산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노래해 왔다. 그러나 요즈음 “자본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찬양을 바꿔야 할 형편이다. 이 세상에서 위험과 탐욕의 이중고를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종교는 탐욕을 억제하고 모든 이들의 위험을 제거하는 공동선을 통해 진정한 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된 종교는 위험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키고 자기 집단의 탐욕을 부추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종교의 구성원이 될 경우 우리는 종교를 통하여 우리 내부의 야만성을 극복하며 참된 구원의 길을 걷는 이들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야만적 본성을 지속시키고 더욱 강화하는 위험한 신앙인으로 양육 받을 소지가 너무 크다.
만일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려면 이렇게 질문해 보면 된다. 우리 신앙의 길에는 이웃 교회와의 진정한 공동성이 있는가? 우리 신앙의 길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길에 마주 닿아 있는가? 우리의 신앙의 길에는 폭력성과 불의가 근원적으로 제거되어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탐욕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다. 신앙의 길은 사랑과 진리의 길이다. 사랑의 길은 온갖 착취와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탐욕의 길과는 모순관계에 있어야 옳다. 그러나 사랑의 자리에 탐욕을 대입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폭력성과 착취적 본성과 이기성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탐욕에 사로잡히면 종교적 통찰과 영성조차 상업화하려는 유혹에 너무나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야만으로 태어난 우리가 찾는 구원이란 사실 야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탐욕에 빠지면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야만성의 강화라는 길로 우리를 오도하게 된다. 그런 종교에서는 평화와 진리의 예수 대신 윤리적 혼합주의가 주인 행세를 한다. 상업화된 영성 속에 혼합된 탐욕의 수단과 방편들이 진정한 예수를 몰아내고 저급한 가치를 수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는 위험에 빠진 이들의 친구가 되기보다 그들을 외면하기를 좋아하고 가진 자들의 탐욕을 자극하고 극대화하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도 그의 시대를 살아가시면서 이런 종교를 보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 시대 신학의 길을 걷는 우리들의 미래가 회칠한 무덤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부단히 탐욕의 길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