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Release:
2014. 10. 14.
여성의 자서전 신학: 요한나 엘레오노라 페테르젠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 은재 교수(교회사)

I. 들어가는 글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대중들이 수긍할만한 행동을 보여줬고, 이는 종교개혁이 단지 특정계층과 신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생활의 영역을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개혁자들은 중세적인 정결의 관점을 비인간적인 처사라며 남성적인 본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독신서약과 무관하게 살고 있던 사제들의 실질적인 상황이 혼인을 함으로써 공적으로 합법화됐다.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보장됐으며, 사제들로부터 추궁과 추적을 당하고 있던 여성 신자들이 보호를 받게 됐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이라는 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은 남성성에 관한 새로운 규정에 관한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즉, 혼인에 관한 종교개혁의 입장은 여성의 가치뿐만 아니라 (남성의) 성의 가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성직자의 결혼을 통해서 두 가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줬다. 하나는 금욕적인 이상과 성적인 절제를 기독교적인 삶의 가장 고상한 양식으로 평가했던 것을 폐지했고, 다른 하나는 그 대안으로 일부일처제라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남성성의 가치를 이성애(異性愛)의 범주에서 바로 잡아줬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넘겨받았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필립 야콥 슈페너는 여러모로 보아 루터의 입장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음이 분명하다. 혼인은 “세속적인 일”이며, 결코 성례전이 아니라고 보았던 루터의 입장을 따랐던 슈페너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신만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첫째는 루터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면, 슈페너는 기독교적인 혼인의 토대를 삼위일체 신학적으로 파악했다. 즉, 혼인은 인간의 타락에 앞서 신적인 제정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갱신됐으며, -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나의 혼인잔치(요2;1-12)이다 - 성령은 혼인의 근거이며, 그 지속을 담당한다. 이를 통해 신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질서인 혼인이 공동체의 양식으로 전환됐다. 공동체는 배우자의 선택에서부터 성생활 그리고 신앙적인 실천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지도와 시설을 감당해야 했다. 둘째로 슈페너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불일치 문제를 시정하고자 했다. 루터는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징계의 하나로서 여성의 복종을 이해했던 반면에 슈페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질서를 우선시했다. 그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의 하녀, 가정부가 결코 아니다. 양자의 관계는 위계질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협력과 지원의 의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신적인 위엄이 남성에게 더 부여됐다고 보았던 당시의 관습을 넘어서는 놀라운 관점인 것이다. 슈페너는 인간의 타락 이전과 이후에 혼인의 연속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비록 혼인이 성례전은 아니지만, 거룩한 상태(엡5;32)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았다. 혼인과 같은 삶의 척도가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과제는 예배, 공동의 기도, 상호간의 돌봄과 경건(훈계)이다. 즉, 혼인공동체의 중심역할은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며, 혼인은 경건한 이들의 모임(collegium pietatis)이 지닌 과제를 지향한다. II. 요한나 엘레오노라 페테르젠(1644-1724)의 생애와 신학

1. 생애
역사가들은 페테르젠 부부가 “심리적이고, 문헌적이며, 신학적으로 매혹적인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더구나 이는 역사적으로 단지 급진적인 경건주의에 국한하지 않으며, 근대의 개신교회사 전체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이런 평가는 요한나 엘레오노라 페테르젠을 강조할 때 해당된다. 그녀는 굳센 의지의 성품을 지닌 활동적인 여성 평신도 신학자요, 복음의 선포자요, 교사로서 독일 경건주의 내에서 가장 많이 읽힌 저자 가운데 한 명이다. 요한나는 1644년 4월 2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버지 메를라우의 남작 게오르크 아돌프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우츠베르크의 마리아 자비나 간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헤센의 옛 귀족가문 출신이었으며, 종가(宗家)는 그륀부르크 근교의 메를라우였다. 헤센-홈부르크의 방백(方伯) 시종(侍從)으로 활동했던 아버지는 시민전쟁의 위험을 피해 가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했다. 요한나가 9살 때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그녀는 일찍부터 깊은 결핍을 경험해야 했다. 언니 필립피나가 학업을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계신 아저씨에게 떠난 다음 요한나는 가사를 도맡아야 했고, 엄격하고 무자비한 아버지 밑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12살이 되자, 그녀에게 새로운 운명이 닥쳐왔다. 그녀는 궁정의 풍습에 익숙해지도록 솔름스-뢰델하임 백작부인의 궁정으로 보내졌다. 백작부인은 착란증세로 고통을 겪었고, 이로 인해 자주 요한나를 때렸으며 심각하게 위협하곤 했다. 결국 아버지가 이를 알아챘고, 15세 때인 1659년에 대모(代母)인 헤센-홈부르크의 안나 마르가레타에게 궁정처녀로 보내졌다. 요한나는 그곳에서 우아한 무희(舞姬)가 되어 많은 상을 받았고, 음악을 동반하는 야외의 윤무(輪舞)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젊은 숙녀 가운데 하나가 됐다. 더구나 그녀는 눈에 띄는 영리함으로 인해 총명한 대화상대자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나는 곧 축제의 공허함과 귀족들의 허영심을 간파했다. 궁정의 오락과 유흥에 환멸을 느끼게 되자 그녀는 언제나 주저하곤 했는데, 궁정의 종업원들은 이런 그녀에 대해 몰이해와 조롱을 보였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가 어떻게 십년 동안이나 이렇게 경박한 삶에 동의했었는지 자신에 대해 비난을 했다. “귀족들 중에는 기독교에 전적으로 반대될 정도로 커다란 악용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녀는 삼년간 궁정에서 지내면서 세속적인 성향에 대해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했고, 종종 눈물을 흘려야 했으나, 그럼에도 이 기간에 요한나는 상당한 교육을 습득했다. 그녀는 당시 궁정의 여성들에게 필수적이었던 프랑스어를 비롯하여 성서를 원문으로 읽을 수 있는 수준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웠다. 무엇보다 이 기간에 익힌 성서는 그녀에게 큰 위로와 도움을 줬다.1) 더구나 엄청난 지식의 갈증으로 인해 이용 가능한 문헌들을 독파했고, 학문적으로 다양한 훈련들을 통해 독학으로도 상당한 학문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2. 영적인 발전
누군가 요한나의 자서전을 철저히 탐구하는 수고를 기울인다면, 그녀가 이미 유년기부터 종교적인 설득력에 대해 개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나는 4살 때의 체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이때 그녀는 어머니와 두 명의 언니들과 함께 헤더른하임의 기사령(騎士領)에 있었다. 한 사환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기병들이 다가온다는 보도를 전했을 때, 어머니는 세 딸과 함께 도보로 프랑크푸르트 방향으로 피신하려고 급히 결정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병들이 가까이에 있음을 감지하고는 높이 세워진 전답(田畓)에 숨고자 했다. 두려움에 가득차서 어머니는 세 딸에게 기도하자고 권했다. 병사들이 지나갔고, 분명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어머니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자며 자녀들에게 권고했다. 이때 첫째 딸은 “더 이상 병사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데,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요한나는 이때의 일을 기억했고, 후에 이를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때 내 마음에 올바른 감정이 들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라거나 혹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으리라는 점에 대해 가슴이 아팠다. 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렸던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그들을 징계했던 것이다” 요한나의 또 다른 초기기억 가운데 종교적인 현실(성)을 위한 민감한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도대체 아이들은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조산원이 하늘에서 아이들을 데려온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요한나는 조산원이 마침내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 아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인사를 전해달라고 조산원들에게 부탁했다. 덧붙여 아이들은 구세주가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알기를 원했다. 요한나가 이미 유년시절부터 (감)동적인 질문을 구성했다는 것은 그녀의 후기 삶에서 열정적인 선포의 근본토대가 됐다. 즉, ‘인간을 향하신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또 다른 체험으로서 유년시절의 신앙과 구세주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사랑을 들 수 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임신해서 침대에서 누워 우는 것을 들었을 때, 요한나는 큰 언니에게 영문을 물었다. 언니는 잘 알려진 귀족의 숙녀가 창녀가 됐다고 알려줬다. 창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요한나는 “무엇인가 나쁜 것” 임에 틀림없다고 인지했다. 따라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눈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간청하기를, 자신이 창녀가 되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후일 요한나는 이 같이 감동적인 체험을 기록했다. “신실한 하나님이 이처럼 단순한 어린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분이 나를 나쁜 기회로부터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음탕한 말과 행동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정결하고 신뢰할만한 곳이 아니라면 그 어떤 단체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들의 배경에는 이미 요한나가 10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찬교리문답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비록 아버지는 처음에 일축했고 마찬가지로 해당목사는 소녀가 어린나이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으나, 요한나는 두 사람에게 강경하게 맞섰고 결국 성찬수여에 참여했다.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신앙은 점점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고, 신앙내용을 비평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요한나는 17세의 숙녀였다. 헤센-홈부르크 공작의 딸이 린츠에서 결혼했을 때, 전체 귀족들의 축제모임이 배를 타고 목적지로 여행 중에 있었다. 그들이 린츠에 다가갈수록 요한나는 큰 두려움에 빠졌다. 그녀는 “교황권의 장소”에서 자신의 영혼이 손상을 입을 수 있으리라고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사람들이 요한나를 젊은 신부의 시녀로서 오스트리아에 남겨두자고 말했을 때, 요한나는 성내예배당으로 가서 자신을 교황권 앞에서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이 기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왜냐하면 계획은 무산됐고, 요한나는 다시 비젠부르크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됐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경험들을 통해서 요한나의 신앙은 확고해졌다.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의 안식 안에 머물렀다.” 이를 통해서 그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뜻)에 자신을 맡기고 언제든지 삶의 목적을 추구하던 일을 멈추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미 습득했던 영적인 지식수준에 비해서 그녀에게는 삶과 신앙이 일치했던(약1;22) 기독교인들의 격려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녀가 1672년 홀슈타인-존더부르크의 왕비를 호위하려고 바드 엠스로 갔을 때, 그곳에서 필립 야콥 슈페너와 만났다. 그와 “몇 시간” 영적인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다. 그녀는 슈페너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감정을 가졌다. 그녀는 이 만남에 대해 기쁨으로 기술했다. “그렇다. 나는 말씀의 설교자요 동시에 말씀의 실천자를 이 세상에서 발견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했었는데, 그런 동료를 만났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분명해진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나의 신앙은 의심할 바 없이 이미 그녀의 경건한 어머니로부터 일찍부터 조성된 뿌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신앙은 비평적인 검토를 거쳤고, 때론 중대한 영적시련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과정 가운데 안정적으로 견고하게 발전했다. 그래서 요한나는 전 생애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었다.
3. 결혼
페테르젠 부부의 혼인은 전형적인 “논쟁결혼”에 해당된다. 그것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르크(August Strindberg)와 같은 파괴적이고, 자기파멸적인 남녀 간의 오래된 투쟁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서로 간에 다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과 다른 이들에게 선사한 환상과 계시들의 적법성을 두고 일어난 상호간의 논쟁을 의미한다. 덧붙여 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승리와 구원의 메시지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깨우쳐주시며, 인도하시고 인정하신다는 확신은 이 둘의 혼인공동체를 위한 기초가 됐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누린 행복한 결혼은 현대인들에게 후기 낭만주의나 감성적인 의미로 오해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완고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바로크 시대의 진정한 자녀들인 것이다. 즉, 강력하면서도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힘을 지녔고, 건강한 자의식과 대담한 열광주의, 종말론적인 기대와 깊은 신앙심 그리고 친절함으로 무장됐다. 교회사 전체를 따져볼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했고, 공동의 이상을 옹호했고,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역사를 만들었던 부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로써 그들은 영적인 혼인서약의 진정성을 획득했고 동시에 기독교 경건의 역사에 새 장을 열어놓았다. 이제까지 혼인에 의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거나 혹은 여성들은 남성의 조력자로만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1660년대 초에 요한나는 혼인에 관해 하나의 특별한 영적시련을 견디어냈다. 당시에는 일상적인 것으로서 요한나는 쿠어작센 브레테비츠의 육군중령의 아들과 결혼을 하도록 이미 결정돼 있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경건주의적인 신앙의 태연자약함으로 특별한 생각 없이 자신에게 기대되는 운명에 순복했다. 그러나 신랑감이 전쟁 중에 “결코 복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전적으로 세상의 욕망을 따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커다란 두려움에 빠졌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가 남자의 욕구를 바꾸거나 아니면 약혼을 파기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이런 남자와의 결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어떠한 경우에도 공공연하게 저항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상당한 숙고에도 불구하고 요한나는 의연하게 행동했으며, 하나님의 해결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 문제는 완전히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해결됐다. 신랑은 두 번째 방문에서 이미 결정하기를, 드레스덴 출신의 더 부유한 여인과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이제 요한나가 예의바르게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비록 이 계획은 그가 음험하게 요한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시중에 퍼뜨렸기 때문에 완전히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곧 사실이 밝혀졌고 그래서 브레테비츠 궁정의 직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요한나는 궁정생활을 통해 되풀이해서 접했던 근심이 더해갔는데, 그것은 “귀족이 보다 불신앙의 삶을 영위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인식은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신념에 이르게 했다. 1674년 요한나가 30살이 됐을 때, 다시 한 남자가 그녀에게 구애를 했다. 이번에는 그 제안이 귀족계급의 대표자가 아니라, 개신교 목회자요 그녀가 신뢰했던 필립 야콥 슈페너로부터 이루어졌다. 요한 빙클러(Johann Winckler)가 때마침 홀아비가 됐고, 그녀를 자신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구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신분의식을 지니고 있던 요한나의 아버지는 혼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곧바로 밝혀왔다. 요한나는 이런 반응이 전적으로 거북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다시 한 번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서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증을 갖게 됐다. 1675년 계모가 죽자, 요한나는 아버지에 의해 병든 젖먹이를 돌보도록 비젠부르크의 고향으로 소환됐는데, 아이가 곧 죽었기 때문에 그녀는 잠시 동안만 부모의 집에 머무르게 됐다. 그 이후 요한나는 두 번 다시 비젠부르크로 돌아가지 않고, 슈페너의 추천에 따라 프랑크푸르트를 여행했다. 그녀는 그곳 경건주의자들의 모임장소인 “자알호프”(Saalhof)에 기거하면서 아이제넥의 마리아 율리아네 바우르의 안내를 받았다. 이내 두 여인은 서로 탁월한 점을 발견했고 “마음과 정신에서” 하나가 됐다. 이곳의 경건한 “사적모임들”은 1630년대부터 지속됐는데, 남-여가 모여 성경을 논하고 특히 기독교 신앙의 일치에 대해 철저하게 물었다. 그러나 “자알호프 경건주의자”들의 특징은 여성들이 활기차게 성서를 나눔에 참여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교사 그리고 상담자로서(비교, 고전11;3-5) 사람들을 섬겼던 것이 사실이다. 1676년 봄, 젊은 신학자 요한 빌헬름 페테르젠이 성서연구에 참석하기 위해서 자알호프에 왔다. 그는 곧바로 여성들의 강력한 선포에 감동을 받았고, 경건주의에 동참했다. 이런 행보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분명 이런 결과의 하나는 폐테르젠이 요한나에 대해 영적으로 감동됐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눈에 띄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런 인품에 매혹되어 곧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매우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치 않았다. 페테르젠은 그녀의 거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의 구애를 계속했다. 요한나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하나님이 아버지를 통해서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 가운데 이 결정을 재빨리 아버지에게 양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를 아버지에게 행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혼인에 동의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1680년 9월 7일 요한 빌헬름 페테르젠은 자신의 영적인 친구인 요한나와 결혼했고, 그녀의 아버지 같은 친구인 슈페너가 주례를 맡았다. 결혼식의 본문은 엡5:32절이었고, 신혼여행은 모든 분리주의자들과 열광주의자들의 피난처인 네덜란드를 거쳐 엠덴과 뤼벡을 지나 오이틴에 도착했다. 그들이 낳은 세 자녀 가운데 단지 한 명만이 유년기를 극복하긴 했으나, 이 결혼은 복된 것이었다. 구스타프 프라이탁은 이 결혼에 대해, “한 쌍의 새가 골짜기의 시련과 난관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듯이 조화로운” 것이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적대와 오해를 감당해야만 했다. 페테르젠은 자신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던 로스토크 대학에서 강사로, 뤼네부르크에서 감독관으로 있다가 1692년 1월 21일 급작스러운 해지통보를 받았는데 이는 첼레의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 고문단)이 천년왕국설에 대한 그의 신념을 둘러싸고 직책을 박탈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삶의 재난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계속해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도록 새로운 문이 열렸다. 페테르젠 부부는 제릅스트에 있는 티머의 영지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귀족들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고, 생을 마칠 때까지 경건하고 신학적인 저술활동에 헌신할 수 있었다. 요한나는 1724년 3월 19일 주일에 사망했는데, 그녀의 나이는 거의 80세에 해당했다.
4. 신학과 활동
이미 20세에 요한나는 영원한 저주(형벌)가 신적인 사랑과 일치하지 않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이 문제로 인해 점차 내적인 고뇌에 빠졌고, 사랑의 하나님이 가난한 이방인(비신앙인)을 영원히 저주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점점 중요하게 인식된 본문은 요3:16절과 엡1:10절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광범위하며 절대적으로 모든 인간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도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전하는 벧전3:18/4:6절을 연구한 후에 이미 오리게네스가 가르쳤던 만인속죄론이 그녀에게 하나의 새로운 계시로 주어졌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됐다. “죽음 이후에도 효력(타당성)을 갖는 그리스도의 피는 지옥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시 구제한다. 다만 타락한 천사들과 성령을 훼방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에게 이런 신념은 “만유회복설”을 통해서 더욱 응축됐는데, 이 가르침은 영국의 여성신비주의자인 제인 리드(Jane Leade)가 그녀의 책 “여덟 세계”에서 발전시켰던 것이다. 요한나가 1685년에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보다 본질적인 인식에 도달했다. 이때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동체와 더불어 백성에 대한 주권(다스리심)을 주장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리라는 것과 그로 인해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 지상에 평화로운 천년왕국이 세워지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덧붙여 그녀는 1662년 자신이 18살에 가졌던 꿈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하늘에 1685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황금숫자로” 쓰인 것을 보았고, 한 남자가 이 숫자가 의미하고 전하는 바는 이 해에 큰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해에 루이 14세에 의해 낭트칙령이 철폐됐다. 동시대의 많은 개신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페테르젠은 이를 성서에 고지된 최후의 압제로 인식했고, 적그리스도(교황권)의 마지막 권력증대로 해석했다. 같은 해에 그녀는 계시록1;3절(“그때가 가까이 왔다”)에 주목하면서 이 꿈을 새로운 인식과 관련시켰고, 바로 도래하시는 주님과 함께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전-세계 교회의 갱신을 고대했다. 자신의 영적인 통찰에 근거해서 요한나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수백페이지에 걸친 상세하고도 포괄적인 주석을 기술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녀는 천년왕국적인 신앙의 고대를 다양하게 거론했고, 더불어 시편, 에스라, 이사야, 다니엘, 미가와 같은 예언서들도 배경본문으로 첨가했다. 이 주석은 종말의 고대라는 사상을 경건주의에 본질적으로 각인시켰으며, 저자인 그녀를 영적인 인물로 잘 알려지게 만들었다. 비록 공동체의 시대에 천년왕국설이 언제든지 관철될 수 있었으며 그리고 바로 종교적인 동기로서 토마스 뮌처, 멜키오르 호프만, 올리버 크롬웰에게서 발견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나 페테르젠과 그녀의 남편의 공로가 매우 크다. 그녀의 남편은 기독교의 미래대망에 관해 필수불가결한 기초를 제공했다.2) 경건주의적인 종말론과 유대민족의 미래에 대한 물음이 밀접하게 결합됐다. 요한나는 1664년의 꿈을 지시하면서 이 문제에 관여했다. 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에게 “미래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고지하셨는데, 후에 그녀는 이를 로마서(11장)에서 확인했다. 16/17세기의 신학자세대들은 유대민족에 대해 계속해서 기각된(단죄된) 것으로 간주했고, 그 결과 반-유대주의가 만연되어 있었던 반면에, 그녀는 적대의 파도에 자신을 내던져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했고, 이 문제에 대해 참회하라는 사유의 전환을 요구했다. 천년왕국과 마지막 때에 유대인의 개종이라는 요한나 페테르젠의 두 가르침은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Pia Deesideria)”에 앞서서 주장됐다. 어쩌면 슈페너가 그녀의 종말론적인 자극을 자신의 고유한 신앙과 사유에로 넘겨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타당성이 있다. 경건주의에서 신앙과 행위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중요한 물음인 칭의론에 있어서도 그녀는 꿈을 통해 신학적인 입장을 발견했는데, 이에 대해 그녀는 후일 성서연구를 통해서 확증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좌나 우로”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즉, 사람들은 선물로 주어진 의(義)를 신앙 안에서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의 행위와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죄 있는 삶에 머물면서 감히 칭의를 구할 수 있다. 요한나는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우리를 받아주시되, 무신론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정당하고 거룩하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 살아야만 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이 물음에서 마르틴 루터의 인식을 올바르게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연옥의 협박으로 닦달하고 선행을 통해서 천국을 구하라고 가르쳤던 “교황의 가르침에 관한 거룩한 혐오”를 획득했다. 요한나 엘레오노라 페테르젠이 매번 꿈들에 관해 말할 때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꿈들과 비전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가르침을 위한 최종적인 논증으로 연관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녀는 꿈들과 비전을 단지 자극, 즉 계시된 진리에 따라 성서를 연구하려는 “지침”으로 이해했다. 그녀는 모든 가르침과 삶의 문제들에 있어서 오직 성서에만 절대적인 우위를 두었다.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시기에, 성서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권위를 갖는다. 이런 권위를 바탕으로 그리고 영국의 신비주의자요 야콥 뵈메의 제자인 제인 레데(Jane Leade)에 자극을 받아 1708년 요한나는 후기의 창조적인 시기에 자웅동주(雌雄同住)의 원-인류에 관한 신학적인 통찰에 도달했다.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은 동시에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유대적인 랍비문헌에서도 이런 테제가 가르쳐졌었으며,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부활되어 초기에 경건주의 사상에 이르렀다. 물론 오늘날의 경건주의는 이 문제를 전적으로 논쟁적인 것으로 비판했으며, 따라서 이런 사상이 관철될 수는 없었다. 좀 다르긴 하지만, 전적으로 흥미로운 가르침은 성령에 관한 이해로서, 그녀는 성령을 하나님의 여성적인 요소로 파악했다. 히브리어를 통해 생각해본다면, 요한나 페테르젠은 세 번째 위격을 “다산의 어머니” 혹은 “부화하는 비둘기”로 생각할 수 있는 통찰에 이르렀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성령의 본질적 특성을 올바르게 인식했는데, 하나님의 영은 그녀에게 상상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즉, 창조를 형성하기 위해서 “물 위를 뒤덮고 움직이고”(창1:2)있었으며, 생리학적인 삶을 창조하셨다.(창2:3) 또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며(요6:6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활동하며(고전12:3), 영적인 전권과 능력을 선사한다(미가3:8/행4:33). 따라서 성서의 계시원천들은 성령에 창조적이고 생명을 일깨우는 요소들을 귀속시켰다고 보았다.

III. 나가는 글: 페테르젠의 의미
페테르젠은 여러 가지 근거에서 경건주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녀는 급진적인 경건주의의 주요 대변자에 속한다. 급진적인 경건주의는 교회를 일종의 제도로 보는 부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분리주의적 경향, 세상과 그 질서로부터 후퇴, 부분적으로는 결혼에 대한 실제적인 포기와 같은 특징이 있다. 둘째, 페테르젠은 경건주의적 인물 가운데 매우 중요한 여성이었다. 경건주의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데, 이는 경건주의가 영적사제직을 강조하고, 제도적인 교회보다 카리스마적인 재능에 더 많은 가능성과 가치를 부여했으며 또한 반-합리적이고, 감정과 실천을 강조한 경험의 종교로서 특별히 여성들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경건주의에서 여성들은 지도와 운영의 기능을 맡았다. 이것은 왜 페테르젠이 경건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셋째로 페테르젠은 슈페너, 쉬츠(Schuetz)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 경건주의에서 여러 해 동안 세 번째 기둥에 해당됐다. 1676년 여름, 31살의 아직 미혼이었던 요한나 엘레오노라는 작은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 모임을 통해 경건한 대화를 이끌고 상호 간에 경건을 세워나가려고 시도했다. 성서를 주해하는 일에 여성들이 의견을 밝힐 수 있도록 허용됐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이 급진적으로 다루어지게 됐다. 페테르젠은 동시대인들로부터 여성신학자로 인지됐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었는데, 이는 너무 신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일에 어울리지 않았다고 회상했는데, 이는 여성으로서 가정의 일에 소홀히 했다는 것과 가르치는 일은 여성의 신분에 무례한 것“이라면서 그녀를 질책했다. 여성의 침실에서는 성서를 너무 많이 읽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면 너무 영리할 것이라며 그녀는 이미 청소년기에 비난을 받았었다. 이런 비난 때문에 페테르젠은 자신의 작품 여러 곳에서 공공연하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여성을 변호했다. 그녀가 저자인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아무런 시련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의 저술활동에서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을 보여주려고 요구했다. 고전14:34절과 딤전2:12절에 따라 바울의 침묵계명을 둘러싼 논증에 대해 그녀는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답변을 내렸다. 그녀는 “바울을 통해 성령이 증거한 것을 존중했으며,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그 어떤 가르침도 여성의 복종(겸손)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녀는 검증을 위해 하나님의 공동체의 판단에 따르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대자들에 맞서 평등에 관한 사상을 담고 있는 갈3:28절 같은 바울의 다른 본문에 호소했으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성령의 분배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여성에게서 억압되거나 약화될 수 없다”고 이끌어냈다. “주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발휘하고 사용할 것이 요청될 뿐만 아니라 의무를 갖는다. 페테르젠은 연약한 자들에 대한 신적인 선택(고전1:27절)도 논거로 내놓았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두고 저술활동 때문에 아내와 어머니라는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식의 비방과 힘겹게 했던 비난들에 맞서 그녀는 “이런 판단은 전적으로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과 나를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위해 증거 하거니와, 나는 외적인 가정의 직업에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발견하고자 애를 썼다”고 설명했다. 이런 인용으로부터 당시 여성들의 참여가 지닌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페테르젠 스스로가 어떤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이미 1691년, 페테르젠에 의해 표현된 중요한 논증에 따르면, 경건주의가 여성들의 공적인 글쓰기와 말하기를 합법적으로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종말이라고 간주된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요엘2:28-29절에 의한 것으로 종말에 여성들에게도 영적재능과 예언자적인 등장이 약속됐다는 것이다. 페테르젠은 “주께서 자신의 성령을 하녀에게도 부어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주께서 이를 행하시되, 더욱 커다란 정도로 행하시리라”는 것이었다. 이점에서 여성신학자요, 여성환상가이며, 여성예언자였던 페테르젠은 잘못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일은 그녀가 믿었던 것처럼 얼마가 지나야만 했던 것이 아니라, 신학에서 여성들이 커다란 역량을 발휘하기까지는 여전히 한 세기 이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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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성구들이 중요한데, 벧후1:4/ 빌2:12/ 눅13:24/ 벧전2:21/ 마16:24/ 벧전4:13/ 눅1:52/ 삼상2:8/ 시46:11/ 벧후1:4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들은 경건주의의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를 위해 잘 알려진 본문들이다. 천년왕국설은 신학사적으로 이미 속사도교부들인 파피아스(Papias), 바나바서(Barnabas) 그리고 교부들인 이레나이오스(Irenaeus)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에게서 나타난다. 물론 천년왕국설은 오리게네스(Origenes) 신학의 영향으로 강력하게 고취됐다. 중세에 들어 피오레의 요아힘(Joachim Fiore, 1135-1202)은 ‘성령의 시대’라는 새로운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후 후스파와 재세례파(뮌처와 호프만) 그리고 청교도인 크롬웰(Cromwell, 1599-1658)을 거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재생됐다. 미국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1847년이었으며, 독일(프로이센)에서는 1908년 여성의 신학수업이 허용됐다. 여전히 카톨릭에서는 여성사제가 차단된 상태이다. Metzler Lexikon Religion, herg. von Christoph Auffarth, Jutta Bernard, Hubert Mohr. Bd. 1, Stuttgart-Weimar 1999, S. 398.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