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Release:
2014. 06. 18.
이봉석 논문 - 가정 공동체
가정 공동체

I.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성(sexuality)이 구분되어 창조됐다. 하나님은 이 둘이 에덴 안에서 가정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사건을 저지르면서 이 구상은 깨어졌다. 이 불순종의 사건으로 이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인 에덴에서 추방당한다. 성과 가정공동체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성(sex)은 죄의 결과로 일어난 행동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유해한 것인가? 가정공동체는 욥의 고백처럼 괴로운 운명적 연합인가 : “나의 모태가 그 문을 닫지 않아 내 눈이 마침내 고난을 보게 되었구나. ··· 빠져 나갈 길은 앞뒤로 막히고 하나님께 영락없이 갇힌 몸, 나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건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성과 죄의 연결 그리고 ‘사랑의 관계’가 없는 가족공동체에 대한 문제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기독교 성윤리를 끌어들인다. 그래서일까? 초기 교부들과 개신교 개혁주의자들은 성윤리에 대하여 많은 글을 써놓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교회 신학자들의 성과 가족공동체 연구의 성과 위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성과 가족의 탄생

자연의 법칙 속에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남겨 놓으려 한다. 새로운 세대의 탄생과 생성의 자연적 순리 속에서 벗어난 생물은 없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서로 뒤엉켜 사랑의 행동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 후손을 세상에 남겨놓는다. ‘생존’과 ‘번성’ 그리고 ‘진화에 대한 기대’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랑은 커다란 존재론적 물음의 시원이다. 즉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영속적으로 남겨놓으려 한다면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인간 역시 생존과 번성이라는 자연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해 차별화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는 인간의 사랑과 동물의 사랑의 차이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은 유전자의 지배 아래 자의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치렀던 성행위에서 처음 싹텄으나, 시간이 흘러 결국에는 인간의 소망이 되었다.”1) 그가 인간의 사랑을 말할 때 본성적 성행위의 우선성보다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해부학적 근거를 가져온다. 즉 동물은 뒤로 성행위를 하지만 인간은 서로 마주보며 성행위를 한다. 이러한 인간의 성행위는 서로 얼굴을 마주볼 때 가능하며, 인간은 상대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간만이 아무 때나 사랑의 행위를 나눌 수 있다’는 것에서 사랑의 즐거움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의 암컷은 번식에 유리한 특정 시기에 발정을 하고 수컷은 이 시기에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여자의 배란은 공공연히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배란과 상관없이 일 년 열두 달 내내 성교를 할 수 있으며 생식보다는 성적 즐거움을 위해 성교를 한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인간의 성행위는 자연법칙에 순응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감정적 차원으로 질적인 전환을 경험한다.
결과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성과 여성은 사랑(amour)의 정서적 중요성을 경험한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범위를 타자에까지 넓혀간다. 즉 지상의 가장 절실한 애정으로 자식을 돌보는 부모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자식으로서 부모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이것이 미셸 세르가 다다른 진정한 사랑의 관계적 원칙이다.
가족공동체 주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사랑이 출산만을 목표로 하는 욕망의 발산에서 닫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적’이라는 포용성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새롭게 사랑의 열린 개념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적 사랑의 속성은 타자와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향한 사랑의 관계성으로 인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가족공동체의 설명이 가능해 진다.
인간이 본능적 군집 때문이 아니라 상호 희생, 상호 돌봄과 같은 상호 관계성 때문에 가족을 이루었다는 견해는 성경의 창세기 1장 27-28절의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 즉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해 주신 것은 모두를 위한 가족제도를 세우신 것이다. 문제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가족공동체 관계가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실상 교부들은 결혼보다 독신을 더 이상적 형태의 삶으로 보았다. 그들의 생각 속에 성은 죄와 연결되어 있다. 그나마 아우구스티누스가 결혼제도를 부분적으로 변론하였다. 그는 『신국론』 제 14권에서 남녀의 결합이 혼인관계로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족제도임을 밝힌바 있다. 이어서 그는 창세기 1장 27-28절을 설명할 때 신약의 세 텍스트를 함께 언급한다. 마태복음 19: 4-6과 에베소서 5: 25-33, 골로새서 3: 19을 인용하여 그는 모든 남편들에게 각각 그들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충고한다. 그가 가족 자체의 숭고함을 윤리적으로 말함으로써 혼인이 낙원의 행복에 합당한 것이며, 혼인을 통해 사랑스러운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고대 교회사가 장-마르크 프리왜르의 요약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출산(디모데 전서 5: 14), 정절 안에서 신실함(고린도전서 7: 3),과 신성한 성결(고린도전서 7: 10-11)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결혼을 선하다고 하였다.2)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적 욕망의 억제라는 제한 속에서 가족제도를 선으로 본 것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교부들이 결혼의 장점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즉 그는 결혼생활을 천국에 비유하면서 이를 장려했다. 결혼적령기의 늦어짐과 독신생활의 증가 그리고 출산율 저하와 노인의 성 등 새롭게 드러나는 사회 현상 속에서 고대 교회에 형성된 성과 가족공동체 개념은 적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오늘날의 성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세속화된 세계에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성윤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기 교부들의 윤리적 변증이 여전히 기독교 안에 유산으로 남아있어 순결, 정조, 신실함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성표현의 자유는 교부들이 성윤리와 충돌해 성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이러한 판단으로부터 인간의 성과 가정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나누었던 ‘관계’ 중심의 제도였다는 창세기 1장 27-28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주례자가 되어 남자와 여자를 연합시켰고 남자는 여자를 아내로 여자는 남자를 남편으로 인정하는 서약이 있었다. 기독교적 가족공동체의 출현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III. 가족공동체와 결혼 계약

결혼은 가족공동체를 설립하는데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일반적으로 결혼을 통하지 않고 가족공동체는 사회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결혼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공동의 삶을 살겠다하는 계약의 가시적 표현이다. 스탠리 그렌즈는 ‘결혼 계약은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용납에 대한 서약을 내포한다’고 말하면서 결혼 공동체가 타락 한복판에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가서에 나타나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향유는 에덴동산에서 잠시 누리다 단절된 사랑의 행위의 완성된 모습이다. 구약학자 이경숙은 아가서의 내용을 미완적 사랑의 완성으로 읽는다. 남자와 여자의 연합이 낙원의 회복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 이 밖에 이 동산에서는 금지된 것이 없다. 일도, 성도 모두 즐겁기만 하고 출산의 산고나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2장에서 ‘너의 열망이 너의 남자를 향해 있을 것이나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라고 파괴와 지배와 불평등을 말하는 것에 반해 아가서에서는 남자의 열망은 오히려 여자의 기쁨일 뿐이다. ···· 아가는, 창세기 2장부터 3장까지의 실패한 사랑의 이야기를, 회복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서정시이다.”3)

이경숙과 그렌즈의 공통된 생각은 성행위가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구원이 샘 솟아오르는 아가페적 사랑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공간은 가족공동체 안에서이다. 아가서를 새롭게 읽으면 창세기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는 죄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가서는 에로스적 사랑의 향유를 통해 에덴의 회복과 구원의 사랑 서정시로 다시 드러난다.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을 가족공동체 안에서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가서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2-4세기 교부는 성을 죄와 연결시켰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55-230)은 성행위 속에 들어있는 공동체적 구원의 계약을 보지 못했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식기를 거세하고 모든 부부의 관계를 거부하였다. 그는 ‘순결함 가운데 독신’을 중시해 재혼하지 말 것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가 성윤리에 관하여 성을 정욕과 죄로 인식한 것이다. 장 크리조스톰(Jean Chrysostome)은 에덴에서 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죄가 없었다면 성교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인류가 번창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성이란 것은 출산을 위해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스의 그레그와르(Gr?groire de Nysse)는 에덴에서 인간은 출산이 필요 없는 천사처럼 존재했다고 여겼다. 그는 만약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할 때 성행위를 하도록 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천사적 삶의 형태에서 추락할 것과 그가 죄 속으로 떨어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초기 교부들이 죄와 성을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족공동체가 성을 매개로한 계약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전체적 조망 속에서 성과 가족공동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건강함과 신실함을 신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성과 죄를 연결해 생각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선지자 호세아는 거리의 음녀와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호세아의 부정한 여인과의 결혼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을 위한 엄중한 메시지였다. 예수 역시 마태복음 19장 4-6절-“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에서 결혼제도의 계약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으며 예수 자신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우주적 하나님을 우리의 일상의 가족 관계 속에 배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이들을 ‘형제’ ‘자매’로 지칭했다. 성을 통하여 설립된 가족공동체 개념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묶이고 인간과 인간이 묶이고 있다.
따라서 가족공동체와 성 그리고 계약을 낙원의 회복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낙원의 회복이라는 신학적 논리 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위한 윤리는 개인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의 공공적 성격으로 확대된다. 로렌즈는 혼약 안에서의 성행위의 공공성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로 성행위의 공공성은 결혼의 법적인 계약이다. 특히 혼외정사가 결혼을 위협할 때 성행위의 재산권 분할과 양육권이라는 공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둘째로 혼약 안에서 성행위는 출산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한다. 이러한 성행위의 공공성을 그렌즈는 레이먼드 로렌즈의 말을 빌어 강조한다. 가족공동체가 사회 공동체와 연결됐다는 것을 드러내므로 인용하여 보자.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항상 잠재적으로 전체 인간 가족의 일이다. 어떤 방식 또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동체와 관련을 맺어야 하는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탄생시키고 만들어내기 때문이다.”4) 셋째로 성행위와 혼약은 도덕과 연관돼 있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관계 밖의 모든 부적절한 성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렌즈는 가족공동체가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신성한 계약이 작동했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개신교적 전통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생활의 장점을 변론한 대표적 인물 루터의 입장을 보면 그렌즈의 생각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누구나 아내를 쉽게 맞이할 수 있으나, 여기에는 변치 않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도전(의무)이 따른다. 결혼생활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발견한 남편은 그로 인해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 결혼생활에 있어서 단지 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치와 성격에 대한 합의가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5)
루터는 여기서 서로의 희생이 결혼생활의 영속을 지켜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동반자 관계가 순결이나 독신생활보다 더 중요한 창조의 질서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정욕의 절제에서 오는 고행을 사랑의 기쁨으로 바꾸는 개혁적 윤리원칙이다.

IV. 나오는 말

기독교 초기 2-4세기, 성은 죄의 결과로 여겼다. 죄와 연계된 성 때문에 교회의 교부들은 성을 멀리하고 기도 수련에만 전념할 것을 수도사와 일반인에게 가르쳤다. 그들은 출산과 관계없는 성을 죄로 규정하며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교부들의 성에 대한 생각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정절, 순결, 정숙은 가족공동체의 건강한 유지를 위한 이념으로서 작용하였다기보다 종교적 수련의 행위를 규제하는 규율로서 작용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교회의 성윤리는 가족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됐기 때문에 가정이 수도원과 유사한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가족제도 안에서 성은 사랑의 계약 확인이며 그 열매로 출산은 하나님 백성의 확장을 가져오는 번성의 축복이다. 가족공동체의 의미를 윤리적으로 생각해도 실패한 사랑으로 끝나버린 에덴의 공동체를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장소가 바로 가정이다. 여기서 모든 여자를 상징하는 이브에게 전가된 죄의 책임성은 더 이상 여자를 열등하게 대우해도 된다는 논리에 설득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모두가 동등한 가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족공동체를 복원된 낙원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서로에게 가지는 동역자다. 가족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느냐 혹은 평화가 없는 암울함의 공동체로 만드느냐는 전적으로 남자와 여자 서로의 노력에 달렸다 할 수 있다. 모두의 가족공동체가 복원된 에덴이 되기를 소망한다.



각주)-----------------
미셸 세르, 이수지 역 『사랑할 때 우리는 동물이 되는가?』 서울: 민음in. 2007. 33쪽.
Jean-Marc Prieur, L’?thique sexuelle et conjugale des chr?tiens des premiers si?cles et ses justifications, RHPR tome 82 n° 3, Strasbourg, 2002, 267-282. 장-마르크 프리왜르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교회사 교수이다. 그는 초기 기독교인의 가정윤리라는 논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결혼제도의 세 가지 긍정적 측면을 변증하면서 교회 안의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의 이원론의 위험성을 넘어서려 했다고 말한다.
이경숙,『생존과 희망의 구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14, 206쪽.
그렌즈, 『성윤리』, 168쪽
S. 오즈맹, 박은구 역, 『프로테스탄티즘 』 서울: 혜안, 2004.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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