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Release:
2014. 04. 17.
어린이 신학에 대한 상담적 고찰
들어가는 말

경북 칠곡에서 계모가 의붓딸을 폭행해서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또 얼마 전 신문에서는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아이가 양부모에 의해 맞아서 숨진 사건이 있었다. 오늘날 방송이나 신문에서 우리는 많은 어린이들이 많은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평생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상담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부모의 행동이나 생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것도 목회상담의 중요하게 해야 할 일중의 하나이다. 고통당하고 있는 어린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 이 글은 특별히 한국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향한 신학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성신학은 소외되고 무력한 사람들이 신학적 숙고의 주체가 되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희망 없이 만들었던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수정을 제공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 있는 많은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신학을 살펴보고 새로운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상당히 오랜 기간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한국 교회에서 무시됐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낼만한 힘도 없었고 많은 경우 어른들에 의해서 돌보아 져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묘사되어 졌었다. 그래서 의존적인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신체적으로 맞거나 감정적으로 학대를 당해도 자신의 아픔이나 고통을 말 할 수 있는 공간이나 그들을 도와줄 만한 신학이 없었다. 그래서 이 논문은 전통적인 어린이에 대한 신학을 살펴보고 그러한 신학으로 인한 문제점을 살펴본 후, 힘 있는 어른들에게 심리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당하는 어린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 필요한 신학을 재구성 할 것이다. 많은 가족 속에서 어린이들은 무력하게 느끼고 어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무력한 것처럼 대한다. 여성학적 입장에서 이러한 이해는 사회적 구성물이고, 어린이들을 위한 효과적인 목회상담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재구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유교적 가치와 맞물려 발전된 어린이에 대한 신학은 새롭게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효과적인 어린이 상담을 위해 우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어린이에 대한 가치와 신학을 살펴보고 이러한 가치와 신학이 현재 어린이들에게 건강한 발달과 효과적인 상담에 유용한지를 살펴볼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와 신학

한국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유교의 가치와 기독교 안에서의 어린이에 대한 신학은 어린이들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교는 사회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가치체계로서 현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가치 체계로 이해되고 있다.1)1) Shim, Kim, and Martin, Changing Korea (New York: Peter Lang, 2008) 27.
사회는 개개인들이 그들의 역학과 사회적 직위에 맞는 의무와 책임을 다 했을 때 조화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개개인들은 사회관계 속에서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고 그 지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가족 내에서도 아버지는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서 권위를 갖게 된다. 가족 관계 안에 있어서 어린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그들의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이고 그들의 부모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다.2)2) Michale Robinson, "Perception of Confucianism in Twentieth-Century Korea," in The East Asian Region: Confucian Heritage and Its Modern Adaption, ed. Gilbert Rozman (Princeton: Princeon University Press, 1991), 221.
이러한 이해 속에서 어린이들은 상대적으로 의존적이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사실, 유교의 원래적 의미는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순종에 대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효는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역사 속에서 왜곡되어져 가족 내에서의 일방적인 관계를 가져 오게 되었다. 그 결과, 부모들은 자녀에게 자신의 힘을 잘못사용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부모와 어른들의 일방적 관계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그들의 힘은 최소화 되고 왜곡된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의 유교적 가치는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일반적 힘의 남용을 초래 했고 이러한 힘의 남용으로 인해 부모와 자녀들 사이는 억압적인 관계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어른들이 자신의 힘을 남용하더라고 어린이들은 순종하도록 요구받게 된 것이다.
많은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 만연한 유교적 가치에 의해서 어린이들은 무력한 존재로 이해한다. 또한 원죄와 관련된 어린이에 대한 신학은 한국 교회 안에서 무력한 어린이의 존재를 지지하게 된다.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이것은 어린이들도 죄인이고 그들의 죄를 회개 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한국 교회 안에서 무력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켰다.
기독교의 한 전통에 의하면 죄인으로서 어린이들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Confession에서 이러한 원죄에 대한 생각을 확장한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설명한다.3)3) St Augustien, The Confession of Saint Augustine, ed. Temple Scott (New York: E. P. Eutton, 1900), 188.
이러한 이해에서 어린이들은 부모와 공동체, 특히 교회의 훈련이 필요하다. 많은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신학을 따른다. 기독교 안에 있는 어린이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어린이들의 죄성과 부모들의 보호와 지도를 강조한다. 어린이에 대한 신학과 유교적 가치는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지도를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은 교회안의 어린이들의 삶속에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에 초점을 둔 현대 계몽주의 생각은 어린이를 덜 이성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참 인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삶속에서 인간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완벽함은 이성이라고 생각한 존 로크(John Locke) 역시 어린이들의 이성은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4)4) John Locke, 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ed. John W. and J.S. Yolt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106.

그래서 어린이들은 어른처럼 그들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어린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5)5) Ibid., 27. 이러한 이해 속에서 어린이들은 “이성적 어른들의 도구로서 존재하는(existing to be instruments of rational adults)”6)6) John Wall, "Fallen Angels: A Contemporary Christian Ontology of Childhood," International Journal of Practical Theology 8, no. 2 (2004): 164.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 시절의 어린이들의 한계성은 자녀들을 부모의 선택과 이해 속에 맞추어지도록 노력하는 부모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월(Wall)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견해는 어린이들의 잠재력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로 훈련시키도록 강요하는 것이다.7)7) Wall, "Fallen Angels," 165.

기독교 전통에서 어린이들은 죄 없는 순수한 존재 혹은 죄인이라는 양가적 갈등적 개념으로 이해됐다. 우선 어린이들은 죄 없는 순수한 존재라는 입장에서 보면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8)8) Friedrich Schleiermacher, Christmas Eve: Dialogue on the Incarnation, trans. Terrance N. Tice (San Francisco: EM Tests, 1990), 36.
이러한 입장에서 어린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사랑한 인간으로서 이해된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적 존재로 교육이 필요한 존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순수함과 선함을 간직한 존재에 더 가깝다. 어린이들은 “세상의 부활과 선함이 현현되기 위한 기회(opportunities for the incarnation of goodness and the renewal of the world itself)”9)9) Wall, "Fallen Angels," 169.
로 찬양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아이들은 그들의 신성한 창조물로서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보호돼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정당화시켰다. 그 결과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책임을 초래했고 어린이의 자기 주도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 안에 있는 어린이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어린이들은 죄인이고, 그래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에 대해 “나는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내안에는 죄가 있는 죄인이다.(I was born in sin and guilt was with me alreasy when my mother conceived me)”10)10) Augustine, Confession, Trans. R.S. Pine- Coffin (New York: Penguin, 1961), 28.
고 말한다. 어린이를 포함해서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구원 받기 위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의존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어거스틴의 견해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어린이들을 인도하도록 돕고 있지만, 부모로 하여금 어린이들의 자연적인 타락을 억압하고 통제해야 함을 가르친다.11)11) Bonnie Miller-McLemore, Let the Children Come (San Francisco: Jossey Boss, 2003) 13.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 속에서 어린이들은 비이성적이지도 않고 순수한 존재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아야만 하는 타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12)12) Wall, "Fallen Angels," 171.

한국교회 안에서 유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은 가족의 가치는 왜곡되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 속에서 가족의 가치는 어린이들을 향한 부모의 지배를 강화시켰고 어린이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지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와 교회 속에 있는 유교적 가치들은 어른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을 제공하면서 그들을 통제하려는 체계 속에서 엄청난 역할을 감당한다. 유교적 가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부모의 욕구에 자신의 욕구를 맞추도록 강요한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부모의 역할은 자녀들을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종종 부모로 하여금 자녀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도록 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어린이들은 더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 통제되는 힘없는 존재인 것이다. 월은 어린이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어른들에 의해 자신들의 능력이 빛을 잃기 때문에 쉽게 힘없는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13)13) Wall, "Fallen Angels," 165-166.
어린이들은 종종 문화와 교회 안에 있는 전형적인 이상과 가치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대신 어린이들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 종교적 환경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어린이들은 질문 없이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자신들을 맞추기에 바쁘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들은 부모 사회 그리고 교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의무의 역할을 실행함으로써 지배적인 교회의 구조와 유교적 규율을 지탱하기만 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어린이들은 그들의 고난이 위치해 있는 사회적 구조와 종교적 신념의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도날드 캅스(Donald Capps)가 주장하듯이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구조는 개인적 독특성을 약화시킨다.14)14) Donald Capps, The Depleted Self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129.
어린이들은 어른들인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물건(object)이 된다. 어린이들은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들은 문화의 규율을 따라야 하며, 만일 그들 자신의 감정과 욕구가 사회나 교회의 것과 맞지 않을 때는 종종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 어린이에 대한 신학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재구성된 어린이에 대한 신학

밀러 맥모아가 주장하는 기독교인의 이상으로서의 상호성(Mutuality)은 교회 안에서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 권위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암시를 준다. 여성학적 입장에서 어린이에 대한 신학을 살펴볼 것이다. 밀러 맥모아는 상호성 혹은 동일한 존중을 기독교인의 이상향으로 제안하면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어린이에 대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15)15) Miller-McLemore, Let the Children Come, 128-135.

에릭슨(Erikson)은 상호성이란 “사람들 각자의 장점을 개발시키기 위해서 서로가 의존해 있는 관계(a relationship in which partners depend on each other for the development of their respective strengths)”16)16) Erik H. Erikson, Insight and Responsibility: Lectures on the Ethical Implication of Psychoanalytic Insight( New York: W.W. Norton, 1964), 231.
라고 정의한다. 돈 브라우닝(Don Browning)은 상호성이란 가족들인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모와 자녀들이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대해주는 기독교의 사랑이라고 서술한다. 그의 기독교의 사랑은 성경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에 근거한다. 이 성경 말씀 속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은 가족 안에서의 문제해결을 위해서 똑같은 존중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한 쪽이 충분히 상응하지 못한다 하더라고 상대방은 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긍정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이 발생할 때, 브라우닝은 한 사람은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상대방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17)17) Don Browning, From Culture to Wars to Common Groun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w Press,1997) 129.

사실 어린이들은 어른처럼 독립적이고 성숙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들 사이의 상호성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었다.18)18) Bonnie J. Miller-McLemore, "Sloppy Mutuality: Just Love for Children and Adults," in Mutuality Matters: Family, Faith and just Love, ed. Herbert Anderson, Edward Foley, Bonnie Miller-McLemore, and Robert Schreiter (Lanham, MD: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4), 128.
어린이들의 신체적 인지적 발달의 미성숙으로 인해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상호성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른과 어린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어른은 어린이보다 도덕적∙영적으로 좀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종종 어린이들을 통제하려는 실수를 한다. 그러나 밀러 맥모아는 어린이들도 부모들이 자녀들의 자아와 존엄성을 존중할 때, 상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모와 자녀들(혹은 어린이들)의 상호성을 완성하기 위해서 밀러 맥모아가 말하는 “과도기적인 서열계급(transitional hierarchy)"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관계가 상호성을 향해 가고 있다면 어른과 어린이들 사이의 불공정한 관계는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관계성이 좀 더 완벽한 상호성으로 전환될 때까지 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좀 더 전문적이거나 권위적이고 더 큰 도덕적 영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일시적인 서열 속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19)19) Miller-McLemore, "Sloppy Mutuality," 129.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상호성이 성취될 때까지 부모들은 자녀들의 욕구와 필요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들의 욕구를 제한해야 한다.
밀러 맥모아에게 있어서 어린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고, 그들은 종종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히려 어린이들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품처럼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 자본주의 속에서 부모와 사회는 우선적으로 자녀들의 성공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밀러 맥모아는 교회 안에 있는 실천신학이 공동의 선을 위해선 공동체 안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리를 내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구와 필요에 의해서만 행동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성은 가능해진다. 비록 이것이 굉장히 복잡하더라고 밀러 맥모아는 만일 어린이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돌봄을 받는다면 그들의 삶속에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가족들로 하여금 함께 가족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고 상의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20)20) Miller-McLemore, Let the Children Come, 146.
그 결과, 어린이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서 공동체 속에 서로 연결돼 있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상으로서의 상호성은 부모들인 자녀들로 하여금 덜 지배적이고 통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녀들의 의견을 공감하고 경청한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행사하는 힘의 남용을 덜 상요하게 된다. 그 결과, 어린이들은 가족, 공동체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소리를 더 갖게 되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