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Release:
2014. 04. 03.
박충구 교수 논문
신앙인과 지식인
올해도 어김없이 냉천골 감신 언덕을 찾아온 새내기들이 있다. 학부 새내기들은 대부분 전국에서 찾아오지만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까지 있으니 전 세계에서 찾아온 셈이다. 신학의 길을 찾아 온 이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신앙인으로 살아온 시간을 정리하고 신학도로서의 삶으로 방향을 정한 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고 이 길을 실존적으로 선택한 이들도 있고, 목회자 집안에서 자라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아 신학도가 되기로 작정한 이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려다가 신학대학을 마지못해 선택하는 이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공동적으로 지니고 있는 요소는 신앙인이라는 점이다. 이번 봄 신학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젊은 신앙인들의 삶에 무한한 하나님의 은총과 따스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들을 신학대학에 보낸 배후에는 한국교회가 있다. 이들을 품고 신앙인으로 자라게 하여 신학의 길을 선택하도록 한 가장 큰 요인은 가족들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목회자다. 어림잡아 말한다면 교회공동체다. 그런데 왜 이들이 신학대학을 찾아 온 것일까? 교회를 통해 배우고 익힌 신앙인으로서는 목회자로 일하기에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젊은이들을 신앙인으로 성숙해 온 의미와는 다소 다른 신학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차이를 신앙인과 지식인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훈련보다 신앙인으로서의 훈련이 더욱 주조를 이루지만 신학대학에서는 신앙인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가꾸는 소양과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우선 신앙인과 지식인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특수한 교회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죄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신앙인이라면 아마도 교회 없이 신앙인의 현존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치 사회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공동체다. 그러한 교회 목회자의 인격, 신앙, 신학, 그리고 가치판단의 구조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곳이 교회다. 이런 점에서 제한되어 있다. 여기서 좋은 목회자와 그렇지 못한 목회자라는 이해가 생겨난다. 이런 이유에서 개체 교회에서 자라 신학의 길에서 만난 새내기들은 서로의 인식과 실천의 구조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아오던 가치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체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요구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나와 다른 이들을 부정하고 배타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새내기들은 우물 안의 세계에서 나온 개구리들과 같다. 세상이 넓고 다양해 혼란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상태를 신앙인에서 지식인으로의 비약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신앙인은 하나님 신앙의 반경이 좁고 짧은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해 특별한 교회를 통하여 양육을 받았지만 아직은 기독교 신앙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경우 신앙인은 근거 없는 오만과 편협한 이해에 천작하여 편협하고 속 좁은 신앙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신앙인이 이런 편협한 신앙을 가지는 것은 그리 큰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이런 상태라면 기독교 신앙의 편협함을 조장하는 목회자가 되어 신자들의 삶의 격을 저급하게 이끌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신학 하는 이들은 지식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것인가? 신앙인이 교회중심의 생활에서 죄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지식인은 인류의 보편사 속에서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인이 잘못되면 자신과 다른 이의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듯이 지식인들이 잘못되면 그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이나 자기집단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과정은 교회중심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환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이 교회를 통하거나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 속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배와 찬양, 성경공부를 통하여 양육된 신앙인, 비록 좋은 신앙을 가진 이라 할지라도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목회자가 되려면 신앙인에서 지식인으로의 면모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신학대학의 커리큘럼은 성경공부 중심이 아니다. 그러기에 신학대학 2년의 교양과정에서는 보편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하여 역사, 철학, 다른 종교, 문학, 예술 등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기초교양을 다진 연후에야 신학일반에 대한 기초과목들을 수강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심화교육 과정을 거치게 된다. 신학대학의 이런 커리큘럼은 결국 신앙인을 지식인으로 키워 신앙을 가진 지식인을 넘어서서 신앙을 가진 전문 지식인으로 양육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비록 이런 과정이 주어진다할지라도 어떤 이는 신앙인으로 머물려는 유아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이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교양적 지식인 정도에 그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이는 신앙인과 지식인과 전문인으로서의 모습을 고루 갖춘 이다. 그래서 독일교회에서는 목사를 신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최초로 쓴 존 뉴만은 대학의 목적을 “보편적이며 자유로운 지식인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이란 파당성이나 편협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자유로운”이란 특정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는 인식과 실천의 자유를 갖춘 지식인을 말하는 것이다. 1980년 이전에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의 자격을 신학대학 정도의 학력을 갖춘 이들로 여겼으나 그 이후부터는 대학 정도의 교육만으로 오늘의 세계를 향한 목회적이며 예언적 기능을 다할 수 없다고 보아 대학원 수준의 교육과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소명을 다하기 위한 까닭이다. 그러나 신앙인이 지식인이 되거나 전문가가 되는 데에는 큰 유혹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남보다 더 깊은 통찰력을 갖추거나 남이 엿볼 수 없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은 그 전문적 지식을 통해 남다른 권위와 지위를 얻는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간혹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전문 지식인들은 일반인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경우 이들은 권력과 부를 쉽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기만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 자기 이해관계에 천작하여 불의한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학전문가가 이런 지경에 빠지면 예언의 소리는 침묵하고, 교회는 혼란에 빠지며 역사는 어두워 진다. 프랑스에서는 지식인을 일컬어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경우 지식인은 양심이 살아있는 지식인이다. 남보다 더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춘 지식인이라면 지식인의 책무, 즉 보다 깊은 의미에서 보편적인 정의, 자유, 평등, 생명, 평화를 위하여 역사에 참여하는 이들이어야 진짜 지식인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의 삶에 참견하셨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와 죄인의 죄를 대신 지셨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 영달과 부귀를 얻게 하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어두운 역사, 분단의 역사, 불의한 역사, 죄 많은 세상에 참견하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부르심에 옷깃을 여미고 성실한 마음으로 응답해야 한다.